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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마포삼열 (사무엘 모펫) 선교사의 한국 사랑과 독립 운동

by 푸른사진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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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을 보았습니다.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만세, 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 함성이 온 나라를 뒤덮었던 1919년 3월 1일, 그날에 역사를 만든 주역 중에 놓친 사람이 있습니다.

평양의 만세 시위 현장에서 고통받는 한국인의 삶을 치유하고 싶었던 우리 조선의 독립을 바라신 분이 바로 마포삼열 목사님입니다. 핍박받는 한국인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숨은 공로였습니다. 가장 약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삶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20세기에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선교사 중 한 분입니다.


3.1 운동 연구의 중심기관인 독립기념관은 서울 특히 탑골 공원 쪽으로만 만세 시위를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의 일곱 개 도시에서 동시에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천도교와 기독교계, 그리고 불교계가 연합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그 모태가 되는 지역적 기반들이 함께 움직였던 것입니다. 천도교와 기독교들이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평안도 지역이 3.1 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양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된 것은 오후 1시, 서울보다 먼저였습니다. 3월 1일 장대 교회와 순덕 학교의 앞마당에서 독립선언식을 했는데, 그날은 마포 목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평양의 만세 시위 현장에 사무엘 오스틴 마펫이 있었습니다.


당시 마펫은 시위대에게 "오늘의 만세 운동은 야만에 대항하는 평화로운 시위입니다. 폭력을 써서는 안 됩니다. 일본 사람들을 모욕하지 마시고, 주목으로 때리거나 돌을 던지지 마십시오. 강 민족이 정의에 입각하여 사람답게 사는 것은 하늘이 주신 권리입니다."라고 당부했습니다.

천도교와 감리교, 그리고 장로교인들의 연합 시위대가 한국의 독립을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인은 일본인 거주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날만큼은 만세를 외치며 일본인 거주 지역을 당당하게 활보했습니다. 마펫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은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비폭력 시위는 평양의 인근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만세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펫은 약 2주간 자신이 목격한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미국 북장로교 본부와 언론에 알렸습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펫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가 되었습니다. 3월 10일경부터 독립신보를 7호까지 출판했는데, 이 모든 일이 마펫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4월 초 마펫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집을 긴급 수색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마펫, 모우리, 베어드 등 주요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색을 실시했습니다. 일라이 모리는 끝내 유죄 판결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자지도 눕지도 못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고문을 받은 뒤, 16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마펫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일제에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한국인의 친구이자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밟은 사람들은 한국인 중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야만적으로 대하는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합법적인 통치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마펫은 점점 더 깊이 독립운동에 개입했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작성한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제2의 3.1 운동이라 하는 대한독립 청년단의 통곡 시위 계획도 그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이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후원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길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3.1 운동이 끝나고 나서도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강을 오가며 자금도 보내는 등의 역할을 서북지역 교인들이 주도했습니다.

한국에 온 마펫

사무엘 오스틴 마펫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된 것일까요? 미국 프린스턴에 사는 92살의 아일린 마펫은 오래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살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40년이 되어가고 남편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삶의 한 부분은 지금도 한국에 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사무엘 오스틴 마펫은 한국에서 선교사였습니다.

아일린과 남편은 노년의 삶을 바쳐 시아버지의 유물을 정리해 프린스턴 신학교에 기증했습니다. 그렇게 프린스턴 신학교의 마펫 기록관이 탄생했고, 베일에 가려졌던 사무엘 오스틴 마펫의 한국 사랑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한국말을 배우는데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미국에 있는 지인과 가족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무엘 오스틴 마펫이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떠난 것은 1889년 겨울이었고,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890년 1월 25일, 그의 26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프랑스 신부를 공개 처형한 대원군이 여전히 집권하고 있었지만, 서울은 선교사들의 안전지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을 벗어나 한국 주요 지역을 도는 탐사에 오릅니다. 약 4년간 아홉 차례에 걸쳐 한반도는 물론 중국 요동과 산동 지역까지 여행했습니다. 거의 전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펫은 한국인들과 어울려 한국식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 위대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인은 지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관리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노동이 천하다는 생각만 버린다면 강력한 민족으로 성장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양에서의 선교 활동

사무엘 어스틴 마펫은 서울을 떠나 평양에 정착하기로 했습니다. 평양 변두리에 허름한 집을 얻어 목회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한국인들은 그를 '널다리골 교회 마포삼열 목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청일전쟁이 터졌습니다. 평양이 격전지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선교사들도 평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지만, 마펫은 "심사숙고 끝에 저는 여기에 남기로 했습니다."라고 결정했습니다.


평양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진 그 해 여름 내내 마펫은 교회와 피난민들 곁을 지켰습니다. "이 사람들 앞에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을 전쟁터에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친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이 그의 작은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 교회는 해마다 새로 지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펫은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제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고, 교회는 우리의 교회다. 선교사들의 교회도 아니고, 선교사들의 신앙도 아니고 우리의 것이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교회를 건축하게 했습니다.


마펫은 미국 북장로교 본부에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 학교와 병원을 지을 자금과 인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펫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는 19명을 배출했습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한국인 목사들에게 넘겼을 뿐만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 전체를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목사들이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인 숭실대학교를 세워 평안도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수준 높은 근대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동시에 한국 여성들의 남다른 교육열에 감동한 그는 최고의 시설을 갖춘 여학교인 숭의여학교를 세웠습니다. "가정의 변화가 곧 사회 변화"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여성을 교육함으로써 차세대의 변화를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마펫의 주변에는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애국적 신앙심을 가진 지식인 청년들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용기 있게 외치는 시대의 등불과도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와 귀국

일제는 기독교 학교들에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자 타나카 도요히코는 "조선에는 합병할 때부터 이미 기독교 학교가 상당수 있었는데, 교육면에서 기독교의 세력은 굉장히 컸고 강했으며, 교육 행정상 그것이 큰 문제였다. 게다가 그 학교의 중심지는 평양이었고, 그 안에는 숭실 대학과 숭실 전문 학교라는 학교가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학교들이 신사 참배를 계속 거부하자 조선 총독부는 언론을 동원해 선교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부터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고,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야스다오는 마펫과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게 신사참배를 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였습니다. 총독부는 어떻게든 평양을 꺾어야 했고, 마펫은 절대 꺾일 생각이 없었으며, 평양이 버텨주면 전국이 버티는 상황이었습니다.


마펫은 "가끔씩 손가락 마비로 글을 쓰기 어렵고, 학교를 폐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결코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결국 1936년 마펫과 평양의 선교사들은 숭실대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를 자진 폐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다른 많은 학교의 자진 폐교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직후 갑자기 마펫의 행방이 묘해집니다. 1936년 10월 말, 그는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를 떠나게 한 것은 한 일본 여인의 편지, 고위 관리의 아내이자 기독교인인 그녀가 마펫에게 위험을 알려준 것입니다. 하지만 마펫은 그 소식을 듣고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마펫은 가진 게 거의 없었습니다. 아내의 고향이었던 마을에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집은 한 지인이 내어준 작은 창고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대부였던 그였지만 남은 것은 가난과 계속되는 병,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여권 한 장뿐이었습니다. 죽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그의 고향은 한국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한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독립을 위해 기도하던 순간까지, 그는 그가 세운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펫의 아들들

마펫은 서북 지역 한국인들에게 삶의 대를 이은 가족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다섯 명 중 네 명이 목회자가 되었고, 한 명은 의료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중 두 명은 한국 선교사가 되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셋째 아들 샘 휴 마펫은 중국 선교사였다가 예일대 박사가 되어 한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30년간 장로회 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대학 교육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의사였던 큰아들 하워드 마펫은 대구의 한 평원에서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일본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일본에 있는 미군 부대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하워드 마펫은 다시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당시 사람들은 회고합니다. 당시 그는 불구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미군이 군막사에서 시작한 작은 병원은 46년 후 대학병원을 포함한 국립 종합병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갔던 하워드 마펫은 자신을 대구에 묻어달라고 원했습니다. 대구에서 한국인 고아들과 함께 성장한 찰스 마펫도 한국인들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한 사람, 선교사 사무엘 오스틴 마펫과 대를 이어 한국을 사랑한 그의 아들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국 역사의 소중한 이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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