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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호머 헐버트 고종의 외교자문 독립운동가 선교사 한국을 뜨겁게 사랑한 미국인

by 푸른사진 2025.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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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6년입니다.

 

당시 헐버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가 살던 뉴욕과 달리 근대 문명이 닿지 않은 조선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헐버트는 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울의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머니, 서울은 쾌적한 도시입니다. 제가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면 어머니는 안도하실 겁니다. 서울은 높이 치솟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원형극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느낌입니다.'

 

조선왕조가 끝나고 근대로 나아가던 때, 격동의 나라를 보내고 있던 대한제국 한국인들 속에 그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이제 막 문명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문턱에서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헐버트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최초의 공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 공원 영어교사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5년간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영어 교사였던 헐버트는 놀랍게도 한글 교과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스스로 한글을 익혀 펴낸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입니다. 당시 한문판 아지도 나올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던 헐버트는 배재학당에서 이 책을 가르쳤습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큰 시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7세가7 되면 먼저 천하 각국 지도와 풍속을 치고 나서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수학, 각국의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같게 한 연휴에 외국 교섭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대한제국에서 반드시 필요한 책이었습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가장 먼저 가르친 과목이 '사민필지' 였던 것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목을 넓히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학문이 세계지리 역사라고 생각했음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학생들도 이 책을 만든 헐버트의 깊은 뜻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교과서의 원본을 지금 현재 우리가 봐도 이질감이 없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 헐버트 선교사가 얼마나 사려 깊게 교과서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걸 본 학생들이 다른 세계에 더 나아가고 싶다는 탐구욕이 열정을 가지게 하고 그렇게 나라를 발전시키고 하는 마음을 고취시키면서 근대화를 하루빨리 앞당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쓰신 게 아닐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을 읽고 쓰게 된 뒤 본격적인 한국어 연구에 착수한 헐버트는 곧 한글의 매력에 빠져버렸습니다. 한국어는 모음 중심의 언어 따라 연설 언어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고, 쉽고 정확한 언어,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할 수 있는 이런 언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결국, 한국어처럼 완벽한 언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렸습니다.

 

헐버트 선생 같은 인식을 우리가 100년만 더 빨리 했어도 어 이런 일제강점 같은 그런 비참한 어떤 역사에 순환을 당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글이 민족 자각으로 가는 지름길을 헐버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선교사의 본분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입니다. 헐버트 박사님은 1906년 이전에 일본의 본격적인 침탈이 시작되었던 때에 여기에 일본인들이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쫓겨날 위기에 있자, 당시에 명망이 상당히 높았던 헐버트 박사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궁리하던 끝에 이곳에 교회를 세운다면 일본인들이 함부로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여기에 교회를 세우기로 합니다. 그때 세워진 교회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아직도 건재합니다. 헐버트는 한국인들과 1달러 토지 매매 계약을 맺어 샀다가 다시 되파는 방식으로 땅을 지켜주었습니다.

 

한일 강제 병합이 있은 이후에, 어 미국 선교 본부에서는 어 우리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지침이 내려옵니다. 웬만하면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 박사님은 그 선교 본부의 지침에 그것을 잘못됐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하십니다.

또 중요한 건, 한국인이 을 그들을 돕는 게 진정한 친구이고 진정한 선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한국인을 돕고자 고군분투했던 헐버트입니다.

 

헐버트는 난국에 처한 한국인들에게 반드시 극복할 것이란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미국 정부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달려갔던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헐버트는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고 1907년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일제가 그의 입국을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2년 뒤 비밀리에 잠시 입국하면서 그는 유서와 비망록을 남겼습니다. 목숨을 건 독립투쟁의 이유가 여기 적혀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그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입니다. 그가 미국으로 갔던 1909년 그 해 하얼빈 저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안중군 열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쓰러트린 것입니다.

 

배우를 찾기 위해 신문을 읽어가던 일본 경찰은 헐버트를 지목했습니다. 그러자 안중군 열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 헐버트입니다.

 

헐버트를 구속할 명분을 찾던 일제는 언론에 거짓 정보를 흘리기도 했는데, 이에 헐버트는 지속적인 투쟁 의지를 밝히며 었습니다. 한국인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헐버트는 책 제일 말미에 '역사가는 예언을 하는 것이 본분이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장차 한민족이 세계에서 우뚝 선다는 그런 희망을 보게 됩니다. 한민족이 언젠가 세계에서 1등 가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나라를 되찾아서 위대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줄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하고 1949년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그런 얘기를 미국 신문과 회견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중단하지 말고 더 당신들 열심히 해서 빨리 남북통일도 이루고 세계에서 그 가장 위대한 민족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헐버트가 왜 그토록 정열적으로 한국을 알리고, 한국의 문제를 미국에 알리려 했는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헐버트에게 한국은 도움이 필요한 여러 나라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 할 소중한 나라였습니다.

 

헐버트가 남긴 것을 찾는 과정에서는 지혜롭고 창의적인 한국문화, 강한 의지로 주변국과 맞서온 한국의 역사가 그를 이끌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뉴욕의 잡지사에 헐버트는 곧바로 이곳에 글을 보냈습니다. 한국의 발명품들 중 다섯 가지 놀라운 발명품을 소개하고,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도 적었습니다.

 

이런 성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잊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즈 자료실에 헐버트 관한 많은 기사를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의 독립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19077월 인터뷰 기사의 제목은 '한국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입니다. 한국인들은 임진왜란 때 끝까지 싸워 승리한 역사를 갖고 있기에 물러섬 없이 독립투쟁을 버틸 것이라 단언했습니다. 을사조약에 관한 인터뷰 기사도 있습니다.

 

을사조약이 무력으로 진행되었기에 이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국제사회에 조약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헐버트는 일본에 의해 강요된 보호 조약의 무효성을 드러내고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릴 것을 결심합니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특사로 임명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깊이 뛰어들었습니다. 헐버트와 고종은 서로 교감을 이어가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이를 토대로 한국과 미국의 조약에도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고종은 미국이 일본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도와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에 대해 미국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헐버트는 기고문을 통해 미국 정부에 미국이 지키지 않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렇게 헐버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알리고 미국이 이에 잘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외칩니다. 이러한 노력은 이어지는 평화의 발전을 이끌어냅니다. 헐버트는 한국의 아리랑을 철저히 연구하며, 이를 서양식 악보로도 엮어 세계에 알리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남긴 삶과 기록은 지금에도 우리에게 큰 의미와 가치를 전달합니다.

한국인을 위대하게 만들고, 또 우리 한국에는 우리 조선 민족의 희망이 있을 것이며, 세계 민족 가운데 뛰어난 민족이 되는 확신을 가지고 그 모습을 본 우리 조선 민족들은 ', 이거구나' 하면서 스스로 깨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남이란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대견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약한 이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작은 나라 조선에 뿌려진 헐버트의 헌신은 시대를 넘어 크고 단단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 헐버트는 해방된 나라의 국빈으로 그렇게 그리던 한국땅을 다시 밟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을 통해 그를 예우했습니다.

 

평생 치열했던 그의 헌신은 영원히 이 땅에 새겨졌습니다. 헐버트가 이 땅에 남긴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 우리에게도 더 없는 큰 기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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