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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에 온 여성 의료선교사 로제타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대 의과대학) 동대문부인병원(이대 부속 병원) 설립

by 푸른사진 202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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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 [ Rosetta Sherwood Hall ]
의료선교사이자 교육자. 평양에 여성치료소 ‘광혜여원’과 맹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했다. 뉴욕맹인교육학원의 원장 W.B.웨이트가 개발한 ‘뉴욕 점자’를 한국어에 맞게 자신이 개발한 교재를 이용하였다.

(두산백과)

 

1010일에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맞닿은 조선은 로제타홀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는 부산항에 24시간 동안 머물 것입니다. 멀리 보이는 언덕과 산들은 매우 가파른 바위투성이었습니다.. 조선은 무척 황폐해 보였습니다.

몇몇 조선인들이 보였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남자들뿐이었습니다.

 

여자들은 해가 질 때까지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로제타의 일기엔 당시 조선 여인들의 안타까운 처지가 곳곳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모두 이름이 없었습니다. 여성들은 '작은애' 혹은 '예쁜이'라고 불리다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으면 아들 이름에 따라 '창식이 엄마' 같이 누구의 엄마로 불립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이 와서 조선의 여자를 봤는데 한국의 여성들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뿐이었습니다.. 개인이나, 자기 자신, 나도 하나의 사람이라는 의식이 없었고, 그래서 시집을 가도 조선의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구’‘누구’ 댁이라고 불렸습니다. 자신의 고향 지역에서 시집을 왔으면, 경주댁, 여주댁 이렇게 불려졌습니다. 이름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조선의 여성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선교사들의 기록엔 이름조차 갖지 못한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로제타의 일기에도 소녀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그녀가 일을 시작한 보구여관에서 만난 여성들입니다.

 

보구여(녀)관[普救女館 ]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전신이다.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이 나에게 꼭 맞습니다. 약제실, 진찰실 모두 훌륭합니다.

현재 서재로 쓰고 있는 넓은 방은 수술실로 쓰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서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 조선 여성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습니다.”

 

로제타는 보구여관에서의 의료활동에 대한 기대가 많았습니다. 이곳에서 약한 자들을 돕고 치료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습니다.

 

토요일 밤 9, 첫 왕진을 갔습니다. 등불을 집 안에 갖다 대자 짚더미 속에서 충혈된 눈을 가진 한 조선 여인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불쌍한 여인은 매우 심한 설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맥박을 재려고 손목을 잡는데,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습니다. 여인은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관식이(동역하는 조선인)를 통해 그 여성 환자에게 우유 한 통과 기침약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약을 그대로 들고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결국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조선 여성들의 의료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을 치료하던 보구여관은 현재의 이대 목동병원으로 성장했습니다. 병원 한 구석에는 로제타를 비롯한 많은 의료선교사들의 땀과 눈물로 이뤄낸 그들의 업적과 살아온 흔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외받았던 조선 여성의 생명을 살린 그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해서 세상에 쓰임 받는 존재가 되도록 조선의 여성들을 교육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세상에 필요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로제타는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에 한국의 여성들의 지위가 이처럼 향상된 것은 이런 선교사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로제타는 물론 그의 남편과 자녀들이 함께 묻힌 가정묘가 만들어졌습니다.

 

로제타는 선교를 준비하면서 만난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신실하고 헌신적인 하나님의 자녀로 열심을 다한 의료선교사였습니다.

 

윌리엄 홀 [William James Hall]

캐나다의 의료선교사. 1891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왔으며, 1892년 로제타 홀과 결혼하고, 1893년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났다. 의료선교사업을 하다가 1894년 발진티푸스로 운명하였다. 1897년 평양에 홀기념병원이 개원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892년 서울에서 결혼을 한 후 윌리엄은 곧바로 평양 선교 책임자가 되어 의료 선교를 펼칩니다. 그때 첫 아이 셔우드는 6개월 갓난쟁이였습니다. 청일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평양 전투에서 윌리엄 홀은 자신의 몸을 돌볼 틈도 없이 부상당한 환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도 로제타의 일기 속에 남아있습니다.

 

윌리엄 홀의 눈은 슬픔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애써 나에게 하려던 말은 자신이 평양에 간 것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는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평양에 갔고, 그분께도 평양에 간 것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로제타는 혹시 울음소리가 들릴까 싶어 안간힘을 쓰며 울음을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베개는 눈물로 젖었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애통의 기도가 로제타에게 터져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데려가지 말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윌리엄의 선교 활동은 짧았지만, 평양 선교의 개척자, 고아들의 친구로 불린 그의 헌신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마저 허락하지 않은 그런 남편이 로제타의 곁을 떠났습니다.

 

눈물로 얼룩졌던 당시 로제타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 윌리엄의 죽음 후에 얻게 된 딸 이디스는 로제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제타의 어린 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겨우 다섯 살, 풍토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엄마로제타는 고열에 시달리는 딸의 상태를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이디스의 호흡 간격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엄마를 바라본 채, 작은 영혼이 서서히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를 잊지 못했습니다. 엄마를 바라본 채, 작은 영혼이 서서히 떠나갔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린 딸이 종종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여성들은 그의 모든 딸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디센테리아, 타이프스, 타이포드, 인세폴라이티스 등의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 여성들과 외국인 선교사 여성들은 모두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들을 데려가셨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선교의 길을 이어간 로제타와 그의 아들은 평양의 기홀 병원(남편 윌리엄홀의 이름을 딴 병원)을 세웁니다.

 

또한 딸의 이름을 딴 어린이 병원도 설립합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강한 신앙의 힘은 사람들이 사라져 간 후에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감리교 선교 지부였던 정동 지역이 있습니다. 선교사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이곳에서 그들은 무슨 꿈을 키웠을까요? 가족을 잃은 슬픔에도 결코 멈출 수 없었던 선교의 꿈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위로한 건 믿음의 결실들이었습니다. 이화 학당을 다니며 보구여관의 의료활동을 돕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특별한 아이의 이름은 점동이었습니다..

 

진료소의 통역을 제법 잘하는 점동이라는 학생과 로제타는 둘이서 일을 합니다. 점동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용감해집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 피를 잘 닦고 혈관을 눌러 지혈하는 일도 제법 잘합니다.

 

로제타에게는 너무도 각별했던 점동이는 1891년에 세례를 받으며 에스더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에스더는 병원에서 함께 일하며 로제타에게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 당신을 돕기 시작하면서 제 어머니처럼 언니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내가 언니를 돕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라고 에스더는 말했습니다.

 

에스더에게 함께 평양에 가서 일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로제타는 물었습니다. 때가 되면 로제타는 이 아이를 미국에 보내 학위를 따게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894년 로제타는 결혼한 에스더를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데려갑니다. 에스더의 새로운 삶이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로제타의 고향 뉴욕의 리버티인데요. 로제타는 에스더를 공립학교에 보내서 미국 대학 입시를 준비시킵니다. 당시 평범한 조선의 여성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남편 박유산은 로제타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을 하며 아내를 도왔습니다. 1899년 지역신문에 실린 박에스더의 기사를 찾아보면 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다녔습니다, 의료 선교사로의 새로운 첫 발을 디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은 지금은 폐교되었고, 학교가 있던 자리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주택가로 변했습니다.

 

미국 생활 4년쯤 아내 곁을 지키던 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내 에스더의 의대 졸업을 보름 앞둔 때였습니다.

 

마침내 에스더는 볼티모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최초의 조선인 여성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주 사역지는 평양의 광혜원이었습니다. 로제타와 함께 평양에서 진료를 시작한 에스더는 수천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열심을 다했습니다.

 

박에스더[Esther Park , 朴愛施德]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한 의료인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양의이다.

(두산백과)

 

에스더는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치며, 십여 년의 불꽃같은 조선의 선교사역을 펼치다 그 역시 남편과 같은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그때 에스더의 나이 서른넷이었습니다.

 

그분이 치료한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두 가지 선물을 준 것입니다. 하나는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서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것과 영혼을 치료하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기독의사로서 진정 그녀가 원했던 것은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들이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는 십 년이란 짧은 기간 사역하고 죽었지만, 그 에스더의 모습을 보고 당시 경성여자의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또 다른 에스더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까지 엄청난 제2, 3의 에스더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를 꿈꾸게 했고, 그녀에게 생명력을 준 것은 바로 로제타홀이 조선에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꿈이 없이 어둠으로 가득했던 에스더를 하나님의 종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한 귀한 존재가 로제타홀 여성 의료선교사였습니다. 이 분의 신앙 유산은 이렇게 조선의 여성들에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묻힌 선교사들은 이역만리 낯선 조선의 땅에 와서 결코 편안하고 넉넉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어두운 조선의 땅에서 이루고 싶은 숭고한 뜻이 있었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부름에 따랐습니다. 오늘 이 어두운 땅에 와서 자신의 삶 전부를 바친 로제타 홀을 기억해 봅니다.

<로제타홀의 업적>

  • 1894년 평양에 국내 최초의 맹학교이자 평양맹아학교의 전신인 ‘평양여맹학교’를 설립.
  • 1898년 6월 여성치료소 광혜여원 설립.
  • 1900년 6월 평양외국인학교 설립. 
  • 1928년 9월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 의과대학의 전신)를 설립.
  • 동대문부인병원(이화대학 부속병원)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 등을 설립.
  • 1951년 사망, 남편이 묻힌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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